2024 정기대관 13회차 김대유 작가 <차이 반복 생성> 01.08.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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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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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미학과 노마디즘적 사유 철학의 재해석 및 창작 〛

 

-김대유 작가 -

 

1. 철학 및 사상적 배경

1) 유목미학과 노마디즘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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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미학의 경계 없는 공간은 유목민의 영토처럼 상호 간 접속하고 넘나들며 가로지름을 상징한다. 이동에 따라 구축과 해체를 반복하며 영토를 생성한다는 것은 철학에 있어 재현이 아닌 끊임없는 창조를 의미한다. 내재성의 사유 체계에 따르면 동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삶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의 표출로서의 실현을 말하며, 잠재성은 장(field)으로 존재한다. 차이 생성은 동일성의 재현이 아닌 무수한 접속 운동에 의한 존재의 창조를 본성으로 한다. 이러한 차이 생성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유목론의 세 가지 원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잠재성의 원리에는 규정된 공간이 없으며 경계가 없다. 둘째, 접속의 원리에는 끝없이 이동 순환하며 공간을 창조한다. 셋째, 다양체의 원리에는 구축과 해체를 반복한다.

이는 생명의 원리에 입각해 명확히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접속은 현실적 존재 방식으로 접속에 의한 배치가 다양체이다. 따라서 유목론의 원리를 본인의 작품과 삶에 적용해보며 수목형과 리좀형 다양체의 시각에서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과 ‘타자’를 포함한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며 유목론의 유의미성을 입증해 보고자 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는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9)에서 서구철학의 양대 지적 전통인 관념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특히 이 저서에서 ‘노마드’(Nomade) 개념을 부각한다. 노마드는 유목민이라는 라틴어로 원래는 초원지대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이 개념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노마드는 공간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사유의 여행, 즉 정신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창조활동을 의미한다.

가타리와 들뢰즈가 공동으로 작업한 「천 개의 고원」(1980)에서는 ‘리좀’(rhizome)과 ‘유목론’(nomadology)과 같은 독창적인 사유가 전개된다.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뿌리처럼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줄기식물을 뜻한다.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모호하며 수평으로 자라면서 덩굴을 뻗고 새로운 식물로 자라나는 리좀은 중심이 없는 불연속적인 표면으로 형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모델과 리좀모델을 대비하면서,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통일적 구조를 가진 수목을 근대성의 표상방식으로, 이에 대해 언제나 새로운 접속을 가능하게 하면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을 허용하는 리좀은 탈근대의 표상방식으로 파악한다.


2) 리좀적 체계 - 지도와 새로운 층위의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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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범주의 상호작용성을 통해 생산되는 예술작품은 재현과 표현의 문제를 넘어, 작품의 저작권과 텍스트에 관련된 여러 쟁점을 야기했다. 무엇보다 작품의 주체이자 중심으로서 작가에게 부여되었던 힘은 분화되고, 탈중심화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리좀의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적 상태”와 같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은 시작과 끝이 아닌 중간 지대로서의 ‘고원(plateau)’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특성의 텍스트는 읽기를 시작하는 출발점도 읽기를 끝맺는 마침점도 없는 영원히 연결되는 상황과 상황의 연속이 되는 것이며, 이 연속의 성질은 끊임없이 이어져 무한의 상태가 된다. 리좀적 체계의 작품은 중심이 도처에 산재해 있으며, 가변적으로 고정된 시점이나 하나의 현상을 텍스트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 체계 그리고 이로 인한 다양성의 원리를 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수많은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일자(一者) 혹은 독재자 또는 중심을 제거하는 < n-1 >의 원리를 가진다. 이러한 ‘중심의 제거’는 수목형 체계로 설명되는 하나의 뿌리를 근거로 활성화된 근대적 사고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따라서 리좀이란 “비체계가 아니라 비중심화된 체계요, 각각의 부분들이 중심으로 귀속되는 상위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웃과 만나고 접속하는 체계고,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며, 그런 만큼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고,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지도’와 리좀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체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 판 위에 최대한 열어 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작품처럼 착상해 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 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3) Rhizome fields - 유목적 사유의 들판을 거닐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의 초원과 사막에서 리좀식으로 전개되는 노마드적 공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잘 짜여진 사고와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사고는 고운 모래밭에 말랑말랑한 베개를 베고 누워 반쯤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거나, 솔밭에서 낮잠을 청할 때 더 잘 이루어진다. 걷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꽃 내음, 가볍게 흔

들리는 밀밭, 잘려 나간 건초더미와 같은 것에 끝없이 지극 받으며 마음을 빼앗

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걸으면서 몽상하기란 쉽지만 걸으면서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날아

오르는 독수리, 흘러가는 구름, 도망치는 산토끼, 엉뚱하게 마주치게 되는 교차

로, 이름 모를 꽃의 진한 향기, 목동의 외침, 혹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의 흰 물

결들이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걷는 것은 꿈꾸

는 자에게 더욱 관대하다. 심사숙고할 때와 달리 몽상을 일단 끊겼다가도 별

어려움 없이 다시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새들, 지분거리는 벌레,

타는 듯이 붉은 진홍빛 꽃, 신발에 부딪치는 조약돌 등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략)

 

사막이나 초원 같은 유목적 공간은 시각에 근거한 정교한 투시법에 의해 인식되는 공간이 아니라 바람, 모래의 형태, 물결, 온도, 그리고 자연의 질감에 감응하는 촉지적 공간이다. 이와 같이 올리비에가 경험하는 공간은 근거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위계적·수목적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리좀적 사유를 자극한다. 자연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색깔, 모양, 소리, 냄새, 강도의 변화를 통해 다른 배치로 쉽게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본에 귀결되는 문명의 수목적 배치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숭고를 경험하게 된다. 올리비에가 말하는 “잘 짜여진 사고”란 기존의 제도에 의해 위계적으로 형성된 영토화·코드화된 문명적 사고를 말한다. 반면에 그가 경험하는 자연 대상은 각각의 이질성이 유지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인 것이다. 따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지분거리는 벌레, 타는 듯이 붉은 진홍빛 꽃, 신발에 부딪히는 조약돌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유는 유랑자가 일상성으로부터 새로운 배치를 찾아 움직이듯이 새, 벌레, 꽃과 조약돌이 각각 탈영토화되면서 새로운 배치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유랑자와 자연 대상은 하나의 배치가 다른 배치로 전환되는 탈영토화되는 지점에서 만나기 때문에 유랑자의 마음속에 숭고의 감정이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같이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대상들은 욕망의 흐름을 자유롭게 절단하고 채취하는 활동을 통해 배치의 변환을 일으키고 이러한 변환 능력이 생명을 생성한다. 따라서 노마디즘적 생명이란 타자와의 접속과 탈영토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랑자 역시 이러한 탈영토화를 가능하게 하는 분자적인(moleculaire) 마음 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자연 대상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분자적 마음 체제는 자연 대상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압에서 자유로운 자연 대상과의 접속을 통해 진정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4) 탈영토화와 리좀적 사유

20세기의 문명사회가 거대소비, 거대생산과 거대국가를 지향하는 정주적 사회였다면 디지털 혁명이 목도되고 있는 21세기 사회는 동시 배치적인 이동성이 강조되고 끊임없이 탈영토화·재영토화·영토화가 반복되는 리좀적 사회이다. 들뢰즈에 있어서 탈영토화는 고착화된 자아를 망각하고 새로운 또 다른 자아를 찾아 나서는 것을 말한다. 공간적 측면에서 유목적 공간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이동할 수 있으며 시간과 기후에 따라 서로 다른 강밀도와 힘을 갖고 있는 임의적 공간인 반면에 정주적 공간은 일정한 강밀도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분할되어 있는 공간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배치(agencement)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기계로 작동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영토화는 국가권력에 의해 배치된 사회 장치에 인간의 삶을 일정한 방식으로 구획 짓는 것이며 탈영토화는 영토화 과정에서 억압에 길들여진 욕망에 저항하여 탈주선(lignede fuite)을 타고 코드화된 영토로부터 스스로 탈주하는 현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저항하는 유목민의 흐름을 가로막고 수로화하여 사회적 코드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노마디즘은 영토화·코드화된 강압과 통제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노마드(nomad)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다양체들을 하나의 체제 안에 질서 지우는 주류의 억압적 사유 방식을 벗어나려고 하는 부류이다.

탈영토화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성 추구 유랑자는 무한경쟁과 강자 독식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기류, 불로소득을 수치심 없이 기뻐하는 속물적 생존주의, 그리고 인간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성취하려고 하는 신분 상승 의식과 같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적 현상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자이며 공간의 이동을 통해 사유의 이동을 기획하는 ‘전쟁기계’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토로부터 탈주하는 노마드는 우리의 신체 기관이 사회적 장치가 강요하는 동일성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유기체의 일부’라는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신체의 각 기관이 독립적이고 개체화된 능력을 지닌 ‘기관 없는 신체’로 인식한다고 하면서 특정한 가치를 고집하는 폐쇄적 정주 공간을 비판한다. 이에 반해 노마드적 공간은 대초원이나 사막과 같이 리좀 식으로 전개되는 열린 공간이다. 리좀적 사유의 특징은 첫째, 각 요소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요소를 창조한다는 접속과 이질성이며 둘째,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즉, 모든 요소들의 결합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동일성으로 귀결되는 수목형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좀의 다양성 개념은 접속되는 항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이 달라지는 다양체를 의미하는 배치(agencement)를 함의하고 있다. 셋째, 리좀은 족보학적 수목처럼 정연하게 분화되는 기표적인 체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표 체계와 단절함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할 뿐이다. 이 같은 리좀의 특징으로 볼 때 리좀은 위계적 질서에 의하여 모든 현상이 하나의 중심점으로 모아지는 수목형 체제를 거부하는 것, 즉 n개의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정점에 위치해 있는 중심점을 제거한 n-1로 표상될 수 있는 비중심화된 체계이다.

진정성 추구 유랑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오지와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그리고 유목 생활을 하는 원주민 마을을 찾아다니며 문명과의 단절된 삶을 모색하기도 하며 삶의 조건이 철저히 배제된 산악 지형, 사막, 극지방을 여행하면서 신체적 고통, 고독, 명상을 통해 자기성찰과 숭고의 감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들이 선택하는 유랑 장소와 유랑행태로 미루어보면 미리 정해진 위계와 유기체적 질서를 따르는 문명사회를 거부하고 어떤 기관에 의해 어떻게 작동되고 결합될지 모르는 유목적 현상을 경험하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성 추구 유랑자들은 문명과의 단절, 자연과의 접속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미지충화·미 형태화된 순수한 질료적 흐름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진정한 유랑을 통해서 문명에서 원시로, 여가에서 생활로, 존재적 공허에서 존재 자체로, 생물학적 생존에서 형이상학적 실존으로 전환하기 위해 모든 신체 기관들의 강밀도(intensite)를 제로인 값으로 만들려는 욕망이다.


2. 철학 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작품 창작

1) 창작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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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개인적 체험과 사유, 철학 사상적 배경을 창작 활동에 반영하여 제10회 개인전부터 최근 제14회 개인전까지 작품 주제와 표현기법의 획기적인 전환을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Rhizome field(뿌리줄기 장)’를 대주제로 정하여 개인전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착상하였으며, 주요 전시 명제는 10회 개인전 <뿌리줄기 장>, 11회 개인전 <Nomadism>, 12회 개인전 <리좀적 사유>, 13회 개인전 <유목적 사유>, 14회 개인전 <탈영토화> 등이다.

작가는 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 언급한 ‘rhizome(뿌리줄기)’ 개념에 ‘field(장)’을 결합하여 ‘Rhizome field(뿌리줄기 장)’라는 용어를 정립하였고, 이를 시각적·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앞서 밝힌 바와같이 질 들뢰즈를 위시한 현대의 철학자들은 나뭇가지의 형상을 위계질서를 갖는 모더니즘적 세계관으로, 뿌리줄기는 유동적이며 비교적 자유롭게 경계를 타고 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으로 비유하고 해석하였다. 작가는 후자의 입장에서 ‘뿌리줄기의 속성’을 작품의 핵심 소재로 활용하여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려는 사고방식을 표방하는 노마디즘(nomadism)적 사고관을 자유로운 조형적 형상으로 표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요 표현재료로 ‘코일 매트’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였다. 코일 매트의 바탕에는 자유롭고 추상적인 흔적들과 뿌리줄기들이 방향을 설정하지 않고 뻗어나가는 것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선형들이 얽혀있다. 작업 과정에서 수십 리터에 달하는 아크릴 물감을 코일 매트의 화면 위에 노즐이 달린 양념통, 플라스틱 막대 등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드리핑(dripping)하거나, 때로는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자동기술법적인 형상들과 추상적인 형상들이 생성되었다. 작품에서 전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부분(뿌리줄기)들은 서로 혼합되고 융화되어 감상자로 하여금 다층적인(multi-layered) 전체의 이미지를 지각하도록 유도한다(측면부도 뿌리줄기가 확장되며 퍼져나가는 의미를 담았음).

이러한 시리즈 성격의 다섯 번의 개인전 경험과 공통 분모를 지닌 주제를 바탕 삼아 새로운 에피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Rhizome field-차이·반복·생성>이다. 작가는 ‘동일성’이라는 불변진리의 개념보다는 무상(無常)하며 반복적으로 생성되나 저마다의 차이를 지니는 존재의 의미를 시각적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작품구성은 크게 특정 크기의 캔버스 작품과 롤 캔버스 천을 펼쳐 ‘뿌리줄기 들판’을 연상하도록 드로잉하여 설치하는 작품으로 구성할 수 있다. 먼저 캔버스 작품은 50호(F), 30호(F) 등의 캔버스에 코일 매트를 재단하여 본드로 부착하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양념통에 희석하거나 원액을 넣어 원하는 모양의 뿌리줄기 형상을 수십 번 반복하여 적층해 나가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또한 롤 캔버스 천을 활용한 ‘뿌리줄기 들판’ 드로잉 작품은 대게 크기가 가로 170cm, 세로 9~10미터 정도이다.

이와 같이 철학적 주제를 재해석하여 시각화하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통해 전시 공간에 조화롭거나 대조적으로 생경한 배치를 통해 주제 의식을 극대화하는 전시를 펼쳐 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