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환, 金斗煥 1913~1994
호는 월성(月城), 설봉(雪峰). 1913년 충청남도 예산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김두환은 1932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3년간 다니고, 1935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 화풍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스승인 다카바다케 다츠시로(高畠達四郞, 1895~1976)와 함께 그렸 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나부〉가 있다. 김두환이 입학하던 1935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다카바다케는 포비즘적 경향의 사실주의 화풍을 구사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1 〈나부〉에는 두텁게 칠한 검은 색 배경과 부분적으로 가한 갈색 터치가 다카바다케 화풍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2 또한 무릎 위에 길게 늘어진 파랑색 타월과 살구빛 살갗이 대비를 이루는 1938년 작 〈나부좌상〉에서도 야수파적 기질이 엿보인다.
김두환은 일본에 유학하던 1930년대 후반 《재동경미술협회전》, 《독립 미술협회전》에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미전에 연속 입선했다.3 1941년 《제28회 이과회(二科會)전》에 〈정좌야 부인상 (正坐也 婦人像)〉으로 입선했고, 1943년 《제6회 재동경미술협회》 에는 전시기간동안 협회 회원들과 채관위문(彩管慰問)에 참가했다. 해방 후 열린 《백우회전》에 제5회를 제외하고 1회부터 8회까지 참여했 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0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김두환은 고향 예산에 돌아와 ‘김두환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향토예술을 탐구했다.4 이곳은 작가의 개인 화실이자 향토문화 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공간이며, ‘서양화 교습소’였다. 제국미술학 교 졸업 후 각종 전람회에 출품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1948년 동화화랑 4층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목록을 보면 예산 화실에서 그린 〈목련〉, 〈백합〉처럼 꽃을 소재로 한 정물을 비롯해, 남대문·자하문·인왕 산·덕수궁 등을 그린 풍경화와 스케치, 그리고 대천 앞바다에서 그린 작품들을 전시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6·25전쟁 기간 종군화가로 활동 했던 김두환은 1952년부터 경동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두 병사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에 난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는 모습을 담 은 〈야전병원〉(1953)을 남겼다.5 김두환은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10여 차례 이상 개인전을 열었다. 경기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한 1960년 김두환은 경주를 방문해 많은 스케치를 했는데, 1960년 개최 한 《제3회 김두환 개인전》에는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에 대한 관심 이 반영된 〈석불〉(경주박물관에서 제작, 1959)·〈仁王像〉·〈立石佛〉 (경주에서 제작, 1959) 등이 전시되었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란 김두환은 이후에도 경주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1960~1970년대에는 향원정, 비원과 같은 고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점 제작했다. 고궁을 그린 대부분의 작가들이 정제된 필치로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담은 것과 달리 김두환의 〈향원정(가을)〉 (1970)과 같이 비원을 그린 작품들은 화면 전체를 파랑색 계열로 밑칠 을 한 후 짧은 터치로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채색해 부드러운 색감과 점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점을 찍어나간 풍경화는 1960~1970년대에 김두환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두환은 이러한 작품을 1975년 《회갑 기념전》, 1978년 《정년퇴임 기념 개인전》 등에서 꾸준히 선보였다. 김두환 작품의 특징으로 감각적인 색채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교직에서 물러나 여행을 다니던 70세가 다 된 1980년대부터이다. 1980년, 동경 유학 시절 친분을 나누 었던 박여일을 5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 도불(渡彿)을 기념한 전시를 열고,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며 구아슈를 이용한 많은 풍경화를 제작했다.
김두환의 작품은 단순한 구성, 후기인상주의 또는 야수주의 경향의 강렬한 색채, 분방한 필치가 특징이다. 또한 일기 쓰듯이 날마다 그린 많은 자화상이 남아있으며, 불교적 소재,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작고한 후 1995년 《한국의 누드미술 80년전》을 비롯해, 2007년 과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소장품전》, 2008~2009년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근대를 묻다》 등 다수의 전시에 작품이 전시되었다. 유작전으로 2009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월성 김두환전(月 城 金斗煥展)》이 열렸으며, 2013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예산군 문화회관에서 《설봉 김두환 회향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는 ‘설봉 김두환과 그의 예술세계’라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함께 진행되었 다. 2017년 모리스갤러리에서도 《설봉 김두환전(雪峰 金斗煥展)》이 개최되었다.
이응노, 李應魯 1904~1989
호는 죽사(竹史)·고암(顧庵). 이응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여 충청남도 예산에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1922년, 19세에 김규진 문하에 입문하여 정식으로 묵화를 사사하였다. 이응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전》에 묵죽을 비롯하여 묵매, 묵란 등 사군자 그 림으로 거듭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 이응노가 1924년 《제3회 조 선미전》에 처음 출품한 〈청죽(晴竹)〉은 김규진의 화법을 그대로 구사한 묵죽화로 김규진의 전통·서화·사의로부터 출발하였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청죽(晴竹)〉으로 특선한 이후 김규진의 영향에서 조금씩 벗어났으며, 중앙 일간지의 신년 휘호에 묵죽 을 수차례 게재하는 등 당시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1 이후 이응노는 작품의 주된 주제였던 묵죽에서 벗어나 1933·1934년 《조선미전》에 각각 난초와 매화를 출품하며 사군자 전반으로 폭을 넓혀갔다. 1936년 이응노는 새로운 그림 수업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도쿄 에 머무르면서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양화연구소 (本鄕洋畵硏究所)’에서 일본 화법과 양화의 기초를 익혔으며, 귀국 후 에도 1944년까지 《일본화원전》에 참가하며 입선과 특선을 하였다.
일본 유학 후, 이응노는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사실적 풍경화를 조선 미전에 출품했는데, 《제1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한 〈황량(荒涼)〉을 비롯해 〈동도하안(東都河岸)〉, 〈동원춘사(東園春事)〉, 〈여름날 (夏日)〉, 〈소추(蕭秋)〉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김복진은 이응노의 작품에 대해 “안정하였던 고향(남화)를 버리고 새로운 모색의 길을 떠난 하나의 이민, 나는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다. 바야흐로 전향기에 섰으니 절충의 파탄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2 일본 유학을 통해 이응노는 문인화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려 사실적이고 정교한 화풍을 구사했다. 1939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개인전은 이응노의 변신을 공식화한, 회화적 방향을 새롭게 모색 한 전시였다. 1945년 해방 직전 귀국한 이응노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부터 이응노는 거리 풍경, 노동자, 전쟁 등 자기주변에서 취재한 삶의 광경을 생동감 있게 그리기 시작했다.
사생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리는 이러한 태도는 필묵 법에도 변화를 가져와 담묵의 선으로 인물의 윤곽을 빠르게 드로잉 하는 구륵법에서 윤곽과 면을 구분하지 않는 몰골법까지 다양하게 구사했다. 1946년 작인 〈양색시〉와 1954년 작인 〈영차영차〉는 이응노의 달라진 필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방 이후 화단의 중진으로 활약하던 이응노는 54세가 되던 1958 년,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나기 전 1955년 개인전 직후부터 1958년 초까지 그린 신작을 중심으로 《도불전》을 개최해 실험성이 강한 작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3 이응노 의 《도불전》은 당시 많은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평론가 이경성은 “이 도불전의 작품경향은 자유롭게 형태를 해체하고, 묵선으로써 운동적인 리듬과 자유분방한 조형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전통을 파괴하고 전 동양화가 뿌리깊게 빠지고 있는 안이한 매너리즘에 서 우선 그 자신을 구하고 나아가서 한국의 동양화 전체가 가야 할 방향 을 설정하였던 것이다.”4 파리에 도착한 이응노는 출국 전에 이미 계획된 개인전을 가졌다.
유럽에서 이응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호평이었고, 1960년 파케티 (Galerie Paul Facchetti)화랑과 계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응노는 동양의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동시에 지닌 ‘문자추상’과 인간군상을 그린 ‘무화(舞畵)’ 등으로 주목을 끌며 세계적 인 화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파케티화랑 소속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는 이응노의 조형정신을 앵포르멜 예술의 한 범주로 해석하였다.5 1964년 이응노는 파리에 위치한 세르누시 미술 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며 동양문화 전파에 힘썼다. 그러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응노는 감옥 속에서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한 재료로 300여 점의 작품 을 제작했고, 프랑스 예술인들의 석방 요구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1969 년 출옥한 이응노는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에서 남은 생을 보내며 서구 의 현대적 조형형식과 동양의 미학을 결합시킨 ‘문자추상’을 시도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이응노는 비민주적 독재체제 항거를 격려하기 위한 정치적 주제의 대작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86년 작인 이응노 의 〈군상〉은 작가 자신의 외침이며 남한에서 일어난 민주화 투쟁의 응원 이었다. 이후 이응노는 남한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기 위해 1983년 부인 박인경 과 함께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80세가 넘는 노령에도 프랑스 파리, 스위스, 일본, 평양, 뉴욕 등 세계 각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이응노는 1989년 1월 10일, 서울 호암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을 때 파리 보인병원에서 심장마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프랑스의 유명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P 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2000년 4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설립되었으며, 2007년 5월, 대전광역시에 새롭게 개관하여 《고암, 예술의 숲을 거닐다 파리에서 대전으로》가 개최 되었다. 또한 2004년 고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응노의 고향 홍성 에서는 ‘고암 이응노 화백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2011년 ‘이응노의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을 개관하는 등 그를 기리는 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응노는 동아시아의 서화전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현대미술사의 거장이라 할 수 있다.
이종무, 李種武 1916~2003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이종무는 1935년 고희동에게 1년간 독서와 데생 등의 지도를 받았다.1 이후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 學校)를 수료하고, 1941년 도쿄의 동방(東邦)미술학원 회화과를 졸업 했다.2 1946년 임군홍·엄도만·신홍휴·한홍택·박병수와 함께 《양화 6인 전》에 참여했다.3 1947년 대한미술협회 상임이사를 역임했으며, 미술문화협회 결성 을 주도했다. 1955년 《제4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수상을 시작 으로 1958년까지 매해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목우회’ 창립 시 총무로 활동했으며, 1978년《상형전》 창립에 참여해 이사장을 맡아 한국 구상미술의 전개와 발전에 기여했다.
이종무 는 1955년부터 1966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을 역임 했다.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국내외에 서 18번의 개인전을 가졌다.4 한국 미술의 국제화에도 힘을 기울여 서울 과 도쿄에서 열린《아시아 교우회전》, 이탈리아에서의 《한국현대미술전, 서울과 프랑스 파리에서의 《한불국제회화전》 창립에 힘썼다. 이종무는 풍경·정물·인물·초상·누드크로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겼고, 주로 고향의 정취와 향토색이 느껴지는 갈색조의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적인 분야는 평생에 걸쳐 답사를 하며 자신이 본 경치를 그린 풍경 화로,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던 1955년작〈향원정〉은 건축물 에 대한 견실한 데생을 바탕으로 경복궁의 누각을 재현한 작품이다. 섬세하게 자연을 관찰하여 온화한 색감과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이종무의 초기 사실주의적 화풍을 잘 보여준다.
초기 작품은 이처럼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둔 자연 풍경이 주를 이루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서구에서 들어온 추상표현 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형태를 해체한 추상적인 작품 경향을 띠기도 했다.5 이 시기 작품에는 구성적이며 기하학적인 패턴과 더불어, 비정형의 추상표현이 드러난다.6 예를 들면 1962년 제작한 〈전원〉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분할하고, 동식물 의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시킨 작품으로 이 시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후 1970년대 들어 다시 구상으로 선회해 1975년 이후《산》연작을 제작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대상을 굵고 진한 윤곽선으로 단순화하 면서 온화한 색채를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2003년 작고하기 전까지 전국을 사생하며 그린 풍경화들은 사실적 인 시각을 반영하면서도 붓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굵은 선 처리와 소박 하고 조촐한 멋을 담은 온화한 그의 성향이 담겨있다. 2003년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2016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천안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이종무 화백 회고전-INTO THE NATURE》이 열려 이종무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바 있다.
최덕휴, 崔德休 1922~1998
최덕휴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해 서울 휘문중학교(현 휘문고등 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 해서 1943년 중퇴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중국 국부군 및 한국 해방군 장교로 중·일 전쟁에 참가했다.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홍성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다시 군에 입대해 1956년 5월까지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복무했고, 이후 교직에 복직했다. 1960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80년 경희대학교 사범대학장으로 취임해 1987년에 정년 퇴임했다.
최덕휴는 1950년 군복무 중에도 개인전을 열어 ‘군인화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50년 《제1회 개인전》을 경기여자중학교의 후원 으로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했으며 1952년에는 성림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1991년의 고희전까지 총 28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56년, 1958년, 1959년에는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며, 1966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1981년까지 꾸준히 국전 에 참여했다. 최덕휴는 1958년 구상작가들의 단체인 ‘목우회’ 창립멤버 로 이종우, 도상봉, 박득순, 박상옥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65년 이후에 는 국제미술교육세계총회(INSEA)의 이사 및 사단법인 국제미술교육 연구협회 한국위원회(INSEA-Korea) 이사장, 국제미술교육아시아 회장, 대한교련 산하 한국미술교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1951년 무공 훈장 화랑장을 비롯해, 1980년 문교부장관 표창, 1987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1년 3・1문화상(예술) 등 많은 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자연전》과 《한국미술’81전》 에 참여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초대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41년(20세) 에 그린 〈무사시노 농장〉에서는 대상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방식과 색상 의 혼합, 질감에 관한 탐구 등 최덕휴가 평생에 걸쳐 구사해온 양식이 감지된다. 최덕휴의 작품은 산과 전원, 도시, 부두, 어선 등 풍경을 소재 로 다룬 구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60년대 초반 비구상적 표현도 시도 했다. 1970~1980년대에는 서울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리며, 서울이라 는 도시에 남다른 애착심을 보였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남산에서 보이 는 서울 풍경〉(1980)과 〈정릉과 미아리〉(1982) 등이 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최덕휴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생의 희노애락 의 감정이 곧 화가 최덕휴의 감정을 따라서 하나의 예술로 결정짓는다.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1940년대의 작품은 그때의 화가 심성의 표현이고, 약간 명랑성을 회복한 1950년대 작품은 희망을 되찾 은 화가의 표정일 것이다. 더욱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다양한 색채감각은 예술가로서 성숙해지는 내적인 변화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덕휴의 작품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변모 했지만, 한국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자신만의 표현기법으로 일관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사후 최덕휴의 작품은 경희대학교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 2003년 경기도 용인시에 최덕휴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김두환, 金斗煥 1913~1994
호는 월성(月城), 설봉(雪峰). 1913년 충청남도 예산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김두환은 1932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3년간 다니고, 1935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 화풍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스승인 다카바다케 다츠시로(高畠達四郞, 1895~1976)와 함께 그렸 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나부〉가 있다. 김두환이 입학하던 1935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다카바다케는 포비즘적 경향의 사실주의 화풍을 구사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1 〈나부〉에는 두텁게 칠한 검은 색 배경과 부분적으로 가한 갈색 터치가 다카바다케 화풍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2 또한 무릎 위에 길게 늘어진 파랑색 타월과 살구빛 살갗이 대비를 이루는 1938년 작 〈나부좌상〉에서도 야수파적 기질이 엿보인다.
김두환은 일본에 유학하던 1930년대 후반 《재동경미술협회전》, 《독립 미술협회전》에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미전에 연속 입선했다.3 1941년 《제28회 이과회(二科會)전》에 〈정좌야 부인상 (正坐也 婦人像)〉으로 입선했고, 1943년 《제6회 재동경미술협회》 에는 전시기간동안 협회 회원들과 채관위문(彩管慰問)에 참가했다. 해방 후 열린 《백우회전》에 제5회를 제외하고 1회부터 8회까지 참여했 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0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김두환은 고향 예산에 돌아와 ‘김두환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향토예술을 탐구했다.4 이곳은 작가의 개인 화실이자 향토문화 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공간이며, ‘서양화 교습소’였다. 제국미술학 교 졸업 후 각종 전람회에 출품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1948년 동화화랑 4층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목록을 보면 예산 화실에서 그린 〈목련〉, 〈백합〉처럼 꽃을 소재로 한 정물을 비롯해, 남대문·자하문·인왕 산·덕수궁 등을 그린 풍경화와 스케치, 그리고 대천 앞바다에서 그린 작품들을 전시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6·25전쟁 기간 종군화가로 활동 했던 김두환은 1952년부터 경동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두 병사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머리에 난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는 모습을 담 은 〈야전병원〉(1953)을 남겼다.5 김두환은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10여 차례 이상 개인전을 열었다. 경기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한 1960년 김두환은 경주를 방문해 많은 스케치를 했는데, 1960년 개최 한 《제3회 김두환 개인전》에는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에 대한 관심 이 반영된 〈석불〉(경주박물관에서 제작, 1959)·〈仁王像〉·〈立石佛〉 (경주에서 제작, 1959) 등이 전시되었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란 김두환은 이후에도 경주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1960~1970년대에는 향원정, 비원과 같은 고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점 제작했다. 고궁을 그린 대부분의 작가들이 정제된 필치로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담은 것과 달리 김두환의 〈향원정(가을)〉 (1970)과 같이 비원을 그린 작품들은 화면 전체를 파랑색 계열로 밑칠 을 한 후 짧은 터치로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채색해 부드러운 색감과 점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점을 찍어나간 풍경화는 1960~1970년대에 김두환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두환은 이러한 작품을 1975년 《회갑 기념전》, 1978년 《정년퇴임 기념 개인전》 등에서 꾸준히 선보였다. 김두환 작품의 특징으로 감각적인 색채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교직에서 물러나 여행을 다니던 70세가 다 된 1980년대부터이다. 1980년, 동경 유학 시절 친분을 나누 었던 박여일을 5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 도불(渡彿)을 기념한 전시를 열고,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며 구아슈를 이용한 많은 풍경화를 제작했다.
김두환의 작품은 단순한 구성, 후기인상주의 또는 야수주의 경향의 강렬한 색채, 분방한 필치가 특징이다. 또한 일기 쓰듯이 날마다 그린 많은 자화상이 남아있으며, 불교적 소재,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작고한 후 1995년 《한국의 누드미술 80년전》을 비롯해, 2007년 과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소장품전》, 2008~2009년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근대를 묻다》 등 다수의 전시에 작품이 전시되었다. 유작전으로 2009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월성 김두환전(月 城 金斗煥展)》이 열렸으며, 2013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예산군 문화회관에서 《설봉 김두환 회향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는 ‘설봉 김두환과 그의 예술세계’라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함께 진행되었 다. 2017년 모리스갤러리에서도 《설봉 김두환전(雪峰 金斗煥展)》이 개최되었다.
이응노, 李應魯 1904~1989
호는 죽사(竹史)·고암(顧庵). 이응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여 충청남도 예산에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1922년, 19세에 김규진 문하에 입문하여 정식으로 묵화를 사사하였다. 이응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전》에 묵죽을 비롯하여 묵매, 묵란 등 사군자 그 림으로 거듭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 이응노가 1924년 《제3회 조 선미전》에 처음 출품한 〈청죽(晴竹)〉은 김규진의 화법을 그대로 구사한 묵죽화로 김규진의 전통·서화·사의로부터 출발하였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청죽(晴竹)〉으로 특선한 이후 김규진의 영향에서 조금씩 벗어났으며, 중앙 일간지의 신년 휘호에 묵죽 을 수차례 게재하는 등 당시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1 이후 이응노는 작품의 주된 주제였던 묵죽에서 벗어나 1933·1934년 《조선미전》에 각각 난초와 매화를 출품하며 사군자 전반으로 폭을 넓혀갔다. 1936년 이응노는 새로운 그림 수업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도쿄 에 머무르면서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양화연구소 (本鄕洋畵硏究所)’에서 일본 화법과 양화의 기초를 익혔으며, 귀국 후 에도 1944년까지 《일본화원전》에 참가하며 입선과 특선을 하였다.
일본 유학 후, 이응노는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사실적 풍경화를 조선 미전에 출품했는데, 《제1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한 〈황량(荒涼)〉을 비롯해 〈동도하안(東都河岸)〉, 〈동원춘사(東園春事)〉, 〈여름날 (夏日)〉, 〈소추(蕭秋)〉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김복진은 이응노의 작품에 대해 “안정하였던 고향(남화)를 버리고 새로운 모색의 길을 떠난 하나의 이민, 나는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다. 바야흐로 전향기에 섰으니 절충의 파탄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2 일본 유학을 통해 이응노는 문인화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려 사실적이고 정교한 화풍을 구사했다. 1939년과 1941년,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개인전은 이응노의 변신을 공식화한, 회화적 방향을 새롭게 모색 한 전시였다. 1945년 해방 직전 귀국한 이응노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개최했다. 이 시기부터 이응노는 거리 풍경, 노동자, 전쟁 등 자기주변에서 취재한 삶의 광경을 생동감 있게 그리기 시작했다.
사생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리는 이러한 태도는 필묵 법에도 변화를 가져와 담묵의 선으로 인물의 윤곽을 빠르게 드로잉 하는 구륵법에서 윤곽과 면을 구분하지 않는 몰골법까지 다양하게 구사했다. 1946년 작인 〈양색시〉와 1954년 작인 〈영차영차〉는 이응노의 달라진 필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방 이후 화단의 중진으로 활약하던 이응노는 54세가 되던 1958 년,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나기 전 1955년 개인전 직후부터 1958년 초까지 그린 신작을 중심으로 《도불전》을 개최해 실험성이 강한 작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3 이응노 의 《도불전》은 당시 많은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평론가 이경성은 “이 도불전의 작품경향은 자유롭게 형태를 해체하고, 묵선으로써 운동적인 리듬과 자유분방한 조형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전통을 파괴하고 전 동양화가 뿌리깊게 빠지고 있는 안이한 매너리즘에 서 우선 그 자신을 구하고 나아가서 한국의 동양화 전체가 가야 할 방향 을 설정하였던 것이다.”4 파리에 도착한 이응노는 출국 전에 이미 계획된 개인전을 가졌다.
유럽에서 이응노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호평이었고, 1960년 파케티 (Galerie Paul Facchetti)화랑과 계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응노는 동양의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동시에 지닌 ‘문자추상’과 인간군상을 그린 ‘무화(舞畵)’ 등으로 주목을 끌며 세계적 인 화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파케티화랑 소속의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는 이응노의 조형정신을 앵포르멜 예술의 한 범주로 해석하였다.5 1964년 이응노는 파리에 위치한 세르누시 미술 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프랑스인들에게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며 동양문화 전파에 힘썼다. 그러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응노는 감옥 속에서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한 재료로 300여 점의 작품 을 제작했고, 프랑스 예술인들의 석방 요구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1969 년 출옥한 이응노는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에서 남은 생을 보내며 서구 의 현대적 조형형식과 동양의 미학을 결합시킨 ‘문자추상’을 시도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이응노는 비민주적 독재체제 항거를 격려하기 위한 정치적 주제의 대작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86년 작인 이응노 의 〈군상〉은 작가 자신의 외침이며 남한에서 일어난 민주화 투쟁의 응원 이었다. 이후 이응노는 남한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기 위해 1983년 부인 박인경 과 함께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80세가 넘는 노령에도 프랑스 파리, 스위스, 일본, 평양, 뉴욕 등 세계 각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이응노는 1989년 1월 10일, 서울 호암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을 때 파리 보인병원에서 심장마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프랑스의 유명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P 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2000년 4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설립되었으며, 2007년 5월, 대전광역시에 새롭게 개관하여 《고암, 예술의 숲을 거닐다 파리에서 대전으로》가 개최 되었다. 또한 2004년 고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응노의 고향 홍성 에서는 ‘고암 이응노 화백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2011년 ‘이응노의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을 개관하는 등 그를 기리는 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응노는 동아시아의 서화전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현대미술사의 거장이라 할 수 있다.
이종무, 李種武 1916~2003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난 이종무는 1935년 고희동에게 1년간 독서와 데생 등의 지도를 받았다.1 이후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 學校)를 수료하고, 1941년 도쿄의 동방(東邦)미술학원 회화과를 졸업 했다.2 1946년 임군홍·엄도만·신홍휴·한홍택·박병수와 함께 《양화 6인 전》에 참여했다.3 1947년 대한미술협회 상임이사를 역임했으며, 미술문화협회 결성 을 주도했다. 1955년 《제4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수상을 시작 으로 1958년까지 매해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목우회’ 창립 시 총무로 활동했으며, 1978년《상형전》 창립에 참여해 이사장을 맡아 한국 구상미술의 전개와 발전에 기여했다.
이종무 는 1955년부터 1966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을 역임 했다.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국내외에 서 18번의 개인전을 가졌다.4 한국 미술의 국제화에도 힘을 기울여 서울 과 도쿄에서 열린《아시아 교우회전》, 이탈리아에서의 《한국현대미술전, 서울과 프랑스 파리에서의 《한불국제회화전》 창립에 힘썼다. 이종무는 풍경·정물·인물·초상·누드크로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겼고, 주로 고향의 정취와 향토색이 느껴지는 갈색조의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적인 분야는 평생에 걸쳐 답사를 하며 자신이 본 경치를 그린 풍경 화로,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던 1955년작〈향원정〉은 건축물 에 대한 견실한 데생을 바탕으로 경복궁의 누각을 재현한 작품이다. 섬세하게 자연을 관찰하여 온화한 색감과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이종무의 초기 사실주의적 화풍을 잘 보여준다.
초기 작품은 이처럼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둔 자연 풍경이 주를 이루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서구에서 들어온 추상표현 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형태를 해체한 추상적인 작품 경향을 띠기도 했다.5 이 시기 작품에는 구성적이며 기하학적인 패턴과 더불어, 비정형의 추상표현이 드러난다.6 예를 들면 1962년 제작한 〈전원〉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분할하고, 동식물 의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시킨 작품으로 이 시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후 1970년대 들어 다시 구상으로 선회해 1975년 이후《산》연작을 제작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대상을 굵고 진한 윤곽선으로 단순화하 면서 온화한 색채를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2003년 작고하기 전까지 전국을 사생하며 그린 풍경화들은 사실적 인 시각을 반영하면서도 붓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굵은 선 처리와 소박 하고 조촐한 멋을 담은 온화한 그의 성향이 담겨있다. 2003년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2016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천안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이종무 화백 회고전-INTO THE NATURE》이 열려 이종무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바 있다.
최덕휴, 崔德休 1922~1998
최덕휴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해 서울 휘문중학교(현 휘문고등 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 해서 1943년 중퇴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중국 국부군 및 한국 해방군 장교로 중·일 전쟁에 참가했다.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홍성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다시 군에 입대해 1956년 5월까지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복무했고, 이후 교직에 복직했다. 1960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80년 경희대학교 사범대학장으로 취임해 1987년에 정년 퇴임했다.
최덕휴는 1950년 군복무 중에도 개인전을 열어 ‘군인화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50년 《제1회 개인전》을 경기여자중학교의 후원 으로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했으며 1952년에는 성림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1991년의 고희전까지 총 28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56년, 1958년, 1959년에는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며, 1966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1981년까지 꾸준히 국전 에 참여했다. 최덕휴는 1958년 구상작가들의 단체인 ‘목우회’ 창립멤버 로 이종우, 도상봉, 박득순, 박상옥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65년 이후에 는 국제미술교육세계총회(INSEA)의 이사 및 사단법인 국제미술교육 연구협회 한국위원회(INSEA-Korea) 이사장, 국제미술교육아시아 회장, 대한교련 산하 한국미술교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1951년 무공 훈장 화랑장을 비롯해, 1980년 문교부장관 표창, 1987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1년 3・1문화상(예술) 등 많은 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자연전》과 《한국미술’81전》 에 참여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초대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41년(20세) 에 그린 〈무사시노 농장〉에서는 대상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방식과 색상 의 혼합, 질감에 관한 탐구 등 최덕휴가 평생에 걸쳐 구사해온 양식이 감지된다. 최덕휴의 작품은 산과 전원, 도시, 부두, 어선 등 풍경을 소재 로 다룬 구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60년대 초반 비구상적 표현도 시도 했다. 1970~1980년대에는 서울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리며, 서울이라 는 도시에 남다른 애착심을 보였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남산에서 보이 는 서울 풍경〉(1980)과 〈정릉과 미아리〉(1982) 등이 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최덕휴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생의 희노애락 의 감정이 곧 화가 최덕휴의 감정을 따라서 하나의 예술로 결정짓는다.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1940년대의 작품은 그때의 화가 심성의 표현이고, 약간 명랑성을 회복한 1950년대 작품은 희망을 되찾 은 화가의 표정일 것이다. 더욱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다양한 색채감각은 예술가로서 성숙해지는 내적인 변화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덕휴의 작품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변모 했지만, 한국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자신만의 표현기법으로 일관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사후 최덕휴의 작품은 경희대학교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 2003년 경기도 용인시에 최덕휴 기념관이 건립되었다